기분이 좋은 상태에서도 중재를 요청할 수 있을까? 글쎄, 상상하기 어렵다. 내 자신 중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기분이 좋아서 언론중재를 신청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것이 어떤 중재든 이미 상당히 감정적으로 크게 상한 상태이기 때문에 중재를 요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언론과 수용자, 상품 판매자와 소비자, 남편과 아내, 친구간 등 모든 인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장 영원히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사 헤어지더라도 손해보고 헤어지고 싶지는 않고, 그러니 불가피하게 제삼자의 중재를 필요로 할 때가 많다.

언제인가 사회적으로 지도급에 있는 어떤 여자 분이 언론중재를 신청한 사건을 내가 속한 중재부에서 맡은 적이 있다. 그 분에게 신청 이유를 설명할 기회를 주었더니, 거의 몇 마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감정이 격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말의 논리가 없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거의 횡설수설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반면에 피신청인인 언론인은 매우 조리(條理) 있게 대응하였다. 그러나 우리 중재위원들은 이미 문서로 제출된 신청이유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언론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원만하게 중재합의에 이르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피신청인, 즉 언론인이 감정이 격해있는 상태도 가끔 있다. 특히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현장에서 언론의 힘 내지 특권을 한창 누리고 있는 또는 나름대로 사회정의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언론인일수록 피신청인이 된 것 자체에 분개한다. 한 마디로 사회악을 뿌리뽑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왜 쓸 데 없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냐는 식이다.

이럴 경우, 중재위원이 신청인의 입장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면 '언론의 기능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면서 노골적으로 중재위원에게 분개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언론인이 감정이 격해지는 경우, 특히 신문사 소속일수록, 자기 주장을 조리 있게 펴지 못한다. 만약, 신청인이 변호사라도 대동해서 나오면 백발백중 논리에서 밀린다. 그래서 글쓰는 언론인과 말하는 중재현장과는 너무 다르고, 언론의 높은 콧대에 젖어있는 언론인일수록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자기변호에 실패한다.

중재현장에서 사실 신청인과 피신청인만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중재위원들도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감정에 휘말릴 때가 있다. 특히 나 같이 대학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젖어있는 사람은 중재현장에서 정말 참기 어려운 상황이 많다. 왜냐하면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학생을 포함한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훈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령도 어리고,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는 즉각 학생들을 대하는 자세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말투 자체도 반드시 정중하기 어렵고, 그것을 참으려고 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다.

감정(emotion)은 과학적으로 말해서 행위결과의 산물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밟으려고 할 때,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 거는 기대나 목표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기대와 목표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목표를 향해서 돌진한 결과, 그것을 성취하면 행복, 만족, 기쁨의 감정을 맛보지만, 그것에 실패하면 실망, 좌절, 분노 등을 맛본다.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은 폭발하고, 심지어 자살 내지 타살의 경지에 가까운 다음 행위로 발전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데 잣대로 삼고 있는 가치 기준들은 분석적으로 이야기하면 바로 감정의 축적물이다. 그 축적물이 사회를 더불어 살아가는 데 매우 바람직한 것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면 큰 일이다. 예컨대, 질서를 지키면서 기대하는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얻는 행복의 감정과 그렇지 못할 때 생기는 분노의 감정 중 어느 것이 더 많이 쌓이느냐에 따라 질서 지키기와 새치기에 대한 가치선호가 달라지는 법이다. 따라서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은 또한 가치관을 사려 깊게 형성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어떤 기대나 목표를 세울 때 흔히 말해서 현실성이 있도록 해야 한다. 전혀 불가능한 기대나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그 만큼 이미 감정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 겸허, 마음을 비우는 것이 도(道)를 닦는 데, 즉 감정의 굴곡을 줄이는 데 긴요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수반되는 절차나 능력을 얼마나 자신의 통제능력 범위 안에 설정하느냐에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환경변화에, 다시 말해서 운(運)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되겠지'보다는 '어떻게 할 수 있지'를 생각할 때, 그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재현장에서 어떻게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까? 해법은 오히려 간단하다. 신청인, 피신청인인 언론인, 그리고 중재위원 모두가 통제 가능한 능력의 범위 안에서 기대나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상호이해’를 목표로 한 ‘커뮤니케이션활동’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설득(persuasion)’하려고 하기보다 상대방과 서로 ‘이해(understanding)’하려는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가치(values) 중심보다는 사실(facts)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고, 그것은 상호이해를 진작시키며, 나아가 중재합의를 이끌어내어 종국적으로 행복한 감정을 생산하는 것이다. 모든 갈등현장을 평화로 이끌 감정 다스리기에 대한 과학적 해법은 이렇게 간단하나, 그것과 동떨어지게 살아온 우리의 행위습관을 타파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은 별개의 것이며, 실천을 위해 운동연습처럼 줄기찬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