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일환의 음악의 발견] 글렌 굴드 「윌리엄 버드와 올랜도 기번즈의 콘소토 뮤직」
글렌 굴드
「윌리엄 버드와 올랜도 기번즈의 콘소토 뮤직」
스티브 잡스가 타계하고 흥미롭게도 인터넷에는 ‘스티브 잡스가 좋아하는 10장의 앨범(Steve Jobs’ 10 Favorite Records)’이라는 기사와 목록이 떠돌았다. 그 목록에 밥 딜런(Bob Dylan)의 「Highway 61 Revisited」를 시작으로 존 레넌의 「Imagine」을 비롯해서 그레이트풀 데드, 잭슨 브라운, 피터 폴 앤 매리, 롤링 스톤즈, 더 후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사실 이것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선호 목록은 아니었다. 스티브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의 키노트에서 유추해낸 목록이었는데, 그가 키노트도 절대 허투루 만들진 않았으리라는 믿음에 기초해 재구성해낸 목록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사후에 많은 것이 신화화되고 있는 마당에 그가 좋아했던 10장의 앨범 목록에 대한 그럴듯한 분석들도 함께 기사화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가 젊은 시절에 즐겨들었던 음악의 목록 이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시대의 명반으로 추앙받을 만한 훌륭한 것들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창조적인 CEO로 평가받는 사람치고는 보수적인 취향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20대 이후로 그는 음악을 듣는데 시간의 거의 투자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눈길을 끄는 음반이 하나 있었다.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가 남긴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The Goldberg Variations)」이었다. 또 다른 기사에 의하면 이 음반은 스티브 잡스가 말년에 즐겨 들었던 것이라고 한다.
클래식 음악에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은 베스트셀러이고 바흐로 입문하는 음반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글렌 굴드는 스티브 잡스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14세에 데뷔하여 천재 연주가로 이름을 날렸고, 1955년 6월에 당대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바흐의「골드베르그 변주곡」음반으로 데뷔하여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64년 이후로는 연주 은퇴를 선언하고 스튜디오로 들어가 레코딩에만 몰두했다. 굴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은 공연장 보다는 완벽하게 통제된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통해 작곡가의 영혼과 직접 대면하고 싶어 했다. 굴드는 1981년 자신의 데뷔 레코딩이었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재녹음했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따라서 굴드하면 많은 사람들이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그의 처음이자 동시에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글렌 굴드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따로 있었다. 17세기 영국의 작곡가인 기번즈(Orlando Gibbons)가 그 주인공이다. 굴드가 생각하기에 한 시대의 마지막을 기번즈보다 잘 드러내는 작곡가는 없었다. 기번즈는 무명 혹은 익명의 작곡가들이 활동하던 르네상스 시대와 특별한 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천재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던 바로크 시대, 다시 말하면 신의 대리인으로서 계시와 같은 직관에 의존하던 시대에서 태어나서 천재적 개인에 의해서 성취된 진리가 대접받는 시대에 걸친 인물이었다. 굴드는 그런 기번즈의 음악에서 특별한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서부터 쇤베르크에 이르기까지, 불후의 명성을 가진 작곡가들의 음악도 즐겨 연주했지만, 그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무명(의 시대에 태어났지만 개인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작곡가의 음악이었다.
굴드는 당대에 말러와 슈트라우스와 같은 관계였던 기번즈와 버드(William Byrd)의 작품을 한 장에 담아 녹음했다. 바흐의 음반에서도 그렇지만 피아노를 마치 하프시코드처럼 연주하는 굴드의 개성적인 터치와 음색은 일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음반은 음악이 스며든다는 느낌, 그것 때문에 신비롭게 들린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보편적인 감동을 선사해줄 수 있는 계시적인 음표를 받아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각성을 시작한 작곡가 개인의 정서도 함께 머금고 있는 느낌이다. 굴드가 가장 아꼈던 기번즈와 버드의 작품을 담은 이 음반이 스티브 잡스의 목록에 있었다면 더 그럴듯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