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분쟁 경험기] 최대한의 배려가 필요했던 탈북자 기사
;최대한의 배려가 필요했던 탈북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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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우 정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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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善意)로 쓴 기사를 상대방이 악의(惡意)로 받아들일 때, 기자로서 가장 곤혹스럽다. 지난 4월 초 언론중재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한 탈북 여성 기사가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평범한 피플 스토리였다. 북한을 탈출한 여성이 한국 사회의 도움을 받아 가족도 이루고 자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 당사자에게 “회사에 달려가 내 몸에 기름을 끼얹고 확 불을 질러 버리겠다”는 거친 소리까지 들었다. 그녀는 조정 때에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이 말을 듣고 ‘아이고, 이거 말이 안 통하겠구나’ 싶어 가급적 무대응으로 조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중재위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렬 직전에 합의를 이뤘다.
정정과 배상까지 수용한 합의였으니 회사에서 좋은 이야기를 들었을 리 없지만, 탈북자 보도와 관련해 꽤 의미가 있는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이 사례에 대한 언론 중재를 계기로 “탈북 기사를 다룰 때 인권 문제에 특별히 주의하라”는 간부회의의 지시도 있었다.
문제의 기사는 중국에서의 탈북자 북송 문제가 한창 이슈로 제기될 때 게재됐다. 메인 기사는 아니었고, 좀 냉소적으로 표현하면 ‘현장ㆍ정책ㆍ인물’이라는 지면 구색을 갖추기 위해 집어넣은 박스 기사에 해당했다. 지면 성격상 선정적일 필요도 없었고, 눈물 쏙 빼는 대감동의 스토리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적당한 수준이면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사는 대단히 구체적이었다. 담당 경찰을 취재하고 탈북 여성을 장시간 인터뷰해서 그녀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탈북 여성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자신의 인생 역정은 기자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말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만 밝혀지지 않는다면 스토리는 게재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게재 사진을 뒷모습으로 하고, 뒷모습 사진조차 흐리게 처리했다. 실제로 사진만 보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사연에 있었다. 탈북 여성의 고향, 아버지 직업, 탈출 경로, 중국 내 거주지역이 기사에 명시된 것이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 기사를 읽으면 대부분 기사의 주인공이 그녀임을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탈북 여성이 중국에서 살기 위해 선택한 행동이라며 적시한 내용이 문제가 됐다. 담당 기자에 따르면 그녀가 인터뷰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경찰도 그렇게 확인했지만, 기사가 나간 뒤 그녀는 내용을 부인했다.
여기서 시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설사 그녀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내용을 적시하는 것이 언론의 온당한 처사인가 하는 점이다. 당사자의 신원을 100% 감출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고 해도 같은 의문은 남는다. 북한 폭력 정권의 문제, 정권 부정부패 문제라면 몰라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약한 집단에 속하는 탈북 여성에 대한 기사라면 아주 작은 선정성이라도 배제해야 하는 것 아닐까. 최대한의 배려가 필요한 기사를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오직 기사의 압축도와 농도만 생각하고 처리한 것이 아닐까. 이런 반성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도 있다. 탈북 여성의 고향, 아버지 직업, 탈출 경로, 중국 내 거주지역을 모두 거짓말로 쓴다면 기사로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모두 익명으로 처리해 ‘A씨는 B일을 하는 C씨의 N번째 아이로 태어나’라고 쓴다면, 이게 대체 무슨 기사인가.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 뿐이고, 기사 요건을 어느 정도 갖추면서 최대한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 기술적인 방법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 자체가 탈북자 기사를 위축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내가 담당 기자와 출고한 데스크에 주문한 내용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자 기사는 많은 팩트를 넣으려고 무리할 필요가 없다. 감동적 사례를 무리하게 쓰려고 할 필요도 없다. 구색 맞추는 정도만 쓴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욕하지 않는다." 데스크가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현장 기자들은 탈북자 근처에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다.
탈북자 기사는 읽는 사람이 많아서 쓰는 것은 아니다. 취재원에게 배울 게 많아서 기자가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신문이 지향하는 노선에 탈북자 문제가 하나의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에 쓰는 경우가 많다. 탈북자 문제에 특별한 애정이나 의지를 갖지 않으면 담당기자로서 버티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언론의 의도적 관심이 필요한 분야가 탈북자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문제를 다루는 기자에 대해서도 일정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나야말로 중재위에서 2시간 이상 그녀와 함께하면서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그녀의 분노와 하소연에 빨리 자리를 떠나 사무실에 복귀하고 싶었다. 중재위는 그녀에게 변호사의 무료변론을 제공했고 필자도 중재에 임하기 전에 회사 변호사와 상의해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왔지만, ‘빨리 결렬됐으면’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나도, 상대 측 변호사도 그녀의 말만 듣고 있는 가운데, 합의를 이루도록 열심히 뛰어다닌 사람이 중재위 담당자였다. 탈북 여성을 설득하기 위해 예상 합의문을 몇 차례 작성해 보여주고, 배상 금액까지 제시하면서 그녀를 달랬다. 설득 시간만 1시간 30분 이상 걸렸다. 대단한 내공이었다.
‘정정보도문과 300만원 배상’이라는 중재위 권고를 회사에 제시했을 땐, 물론 절대로 유쾌하지 않았다. 싸게 막은 것인지, 비싸게 막은 것인지에 대해 누구에게 물어본 일도 없다. 이번에 배운 것을 충분히 업무에 적용하면 그 이상의 가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의심도 든다. 혹시 내가 사회부를 떠난 뒤 후임 데스크가 똑같은 탈북자 기사로 또 몇 백만원짜리 청구서를 중재위에서 들고 오는 것은 아닐까? 하루 수백 건의 기사가 기계적으로 휙휙 출고되는 것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탈북자 기사도 ‘자살 보도’의 경우처럼 무언가 정형화된 가이드라인과 준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즘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