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일환의 음악의 발견] Bon 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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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 Iver "Holo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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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이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도 이제는 문화강국이 된 것처럼 말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여전히 세계의 음악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불안감이다. 일례로 지난해 주요 잡지나 웹진에서 꼽은 2011년 베스트 음반들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라이선스로 발매되지 않은 것들로 수두룩하다. 지금 바로 주목해야할 음악들과 그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멀리 물러서 있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독일의 지휘자 겸 음악학자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우리 삶에서의 음악>;;;;;;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들은 양적으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음악을 듣고 있다. 그것도 거의 끊임없이 음악과 함께 하면서도 그 음악이 우리의 삶에서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사소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 모순에 찬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음악이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즉 장식으로서의 음악은 우선 아름다워야만 한다. 음악은 결코 껄끄러워서는 안 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도 안 된다.” 아르농쿠르가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아름다움’이란 음악의 수많은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그저 아름답기만 한 음악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음악만을 찾고, 음악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음악의 경험이 삶의 외부에서 일어나고, 음악이 장식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을 전체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좋은 것, 편한 것, 아름다운 것, 유쾌한 것만 삶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 말이다. 에릭 윌슨이 말한 것처럼 요즘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잘 짜인 행복 방정식에 맞춰 항상 방긋거리며 만족의 통념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 것이다. 불쾌하거나 어둡고, 무겁거나 격식을 갖춰야 하는 것, 깊고 복잡한 것에는 눈을 돌리거나 배제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즐기는 음악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반영할 수도 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저스틴 버논(Justin Vernon)의 원맨밴드인 본 이베어(Bon Iver)의 두 번째 음반「Bon Iver, Bon Iver」는 포크에 기반하고 있지만 어둡고 무겁고 복잡하면서 깊은 음악을 들려준다. 가성을 즐기는 버논은 보통의 팔세토 창법과는 달리 미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상처난 발성으로 거칠게 노래한다. 특히 그의 목소리는 아직 미처 헤어나지 못한,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악기 운용은 순수한 음색과 연주 스타일, 관습적인 구성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다양한 현악기, 관악기, 페달 스틸 기타와 밴조, 그리고 일상적인 잡음들까지 삽입되어 있지만 사실 연주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러니까 ‘노래처럼 연주되는’의 특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파편’같은 소리들이다. 이런 파편같은 소리들을 엮어서 그는 순수하게 감정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것이 어떤 것에 관한 감정인지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제한적이면서 동시에 열려진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개인적으로 이 음반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진정으로 놀라운 성취는 소리의 울림, 소노리티(sonority)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소노리티는 그저 단순한 울림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창조된 압도적인 울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소노리티는 리얼하게 녹음된 ‘사실적이고 생생한 소리’와는 다르다. 소노리티는 레코딩이나 믹싱 엔지니어에 의존하는 기술적인 요소가 아니라, 연주자나 창작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예술적 요소에 가깝다. 이 음반에서는 저스틴 버논의 지휘 아래 압도적이면서도 화려한 울림이 펼쳐진다. 나는 구체적으로 이런 식의 울림을 상상한 적은 없지만 항상 음악에서 이런 울림을 듣게 될 ‘순간’을 꿈꿔왔고 만나게 되었다. 심지어 이런 소노리티는 앨범의 타이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음반의 타이틀은 「Bon Iver, Bon Iver」다. 반복되는 Bon Iver는 앞 선 Bon Iver의 메아리다. 앞의 Bon Iver가 버논 자신이라면, 메아리는 이미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해도,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진 않고 누군가의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