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의 책] 신분의 벽을 부수고 평등사회를 연 『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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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의 벽을 부수고 평등사회를 연 『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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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태 진
언론중재위원 (2005. 11. ∼ 2008. 3.)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
;동아일보 기자 ;
;15년 전쯤 출판인산악회 회원들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괌미터)까지 등반을 했다. 그때 우리 일행보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등반을 했는데, 산행을 지휘하는 현지 책임자 두 명은 우리가 멘 것보다 작은 가방을 메고 편안하게 산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일을 잘하면 저 두 사람처럼 책임자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네팔은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낮은 계층 사람은 책임자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드릴 때 현재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죽고 난 뒤의 내세를 위해 기도하면서, 다시 태어날 때는 상위 신분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네팔 국민이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신분제도 때문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우리도 조선시대까지는 신분사회였다. 만약 지금껏 신분제도가 남아 있다면 우리도 네팔처럼 가난한 나라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개혁에 앞장섰던 이들은 실학자였다. 이들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이 외침을 계속 당하는 것은 나라가 가난해서 힘이 없기 때문인데,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꾼인데 정작 그들에게는 자기 땅이라고 깃발을 꽂을 땅 한 평 없고, 권세 있는 궁방, 아문, 양반 토호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농산물의 증산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학자들은 농민 한 호가 소유할 수 있는 영업전을 주고 이 땅은 매매할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또 고을마다 학교를 만들어 학생을 양반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교육한 뒤, 고을에서 시험을 봐서 합격한 학생을 한양으로 보내자고 했다. 학생을 양반에만 국한시키지 말자고 한 데에는 신분 철폐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당시 실학자들의 제안을 조정 대신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권철신과 이벽, 정약용 형제, 이승훈 같은 실학자들은 1779년 12월 천진암 강학회에서 서학(西學, 천주교)을 깊게 토론한 뒤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종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내리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 천주교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은 하느님의 자손이다.”라는 교리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며, 일부일처제는 축첩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외침이며, 주일을 정해 그날은 일하지 않고 기도만 드리는 것은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쉬는 날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노동혁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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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사건을 뼈대로 하고 문학적 진실로 살을 채워 넣은 장편소설이다.
;중국 철학을 전공한 임금자 수녀가 쓴 『파격』은 순조 34년(1883년)에서 헌종 13년(1847년)에 일어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사건을 뼈대로 하고 문학적 진실로 살을 채워 넣은 장편소설이다. 『파격』은 낙방 서생 정시윤이 우연히 김재연을 만나 상인으로 변신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언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판단력을 겸비한 역관 김재연은 정시윤을 데리고 동지사 일행과 베이징을 향해 떠난다. 김재연은 서양 세력과 청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마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영어까지 배워오라는 순조의 밀지를 받고 떠난 것이다. 김재연의 도움으로 크게 성공한 정시윤은 베이징에 상점까지 내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서양 세력의 본거지인 중국 남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는 상하이와 광저우를 넘어 미국을 향해 배를 띄운다.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만이 조선 백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 믿고 베이징을 드나들며 성직자가 없는 조선에 성직자를 데려오려고 노력하는 유진길의 소설 속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청국은 영국을 비롯한 서양제국이 아편을 대량으로 들여오는 문제로 갈등을 빚어오다 결국 전쟁으로 치닫는다. 청국은 서양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 몇 척에 불과한 영국 함대에 패하고 난징조약을 맺음으로써 서양 세력의 중국 상륙이 자유롭게 된다. 이 아편전쟁을 종결하는 난징조약 현장에 프랑스 세실 제독의 통역관으로 김대건이 참관한 사실과,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만이 조선 백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 믿고 베이징을 드나들며 성직자가 없는 조선에 성직자를 데려오려고 노력하는 유진길의 소설 속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파격』은 유진길이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키는 데 성공하고, 조선인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의 활동과 기해박해와 병오박해를 겪는 신도의 순교를 그린 종교소설이다. 또한 종교소설 이전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 다시 말해 신분의 벽을 부수고 평등사회를 연 사람들의 이야기로 엮어진 역사소설이다. 그 시절 신분의 벽을 허물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어떠할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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